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듬직한 우철은 무당 치마처럼 휘몰아치는 바람이 부는 날,
전날의 숙취로 오후 2시에 깨어난 날,
서점에 가자는 선배이자 선생님(그는 '장세이의 말하기 교실'의 유일한 수강생)인 세이의 말을 순순히 따라주었다.
붓기가 덜 빠진 눈으로 나무늘보처럼 웃는 우철을 끌고 남부터미널역에 갔다.
목도리를 사러.
그럼에도 우철은 서점에 가는 거 아니냐고 따져 묻지 않아 좋다.
보답은 아니지만 모자를 사 주었다.
옷가게 점원 언니는 전날 내게 했던 실수에 대한 미안함은 아니지만 모자값을 받지 않으셨다.
신난 우철은 이사님의 지시대로 흰 우유를 사서 그녀의 집에 처음으로 방문했다.
"처음 가는 집에 흰 우유 사들고 가긴 처음이에요. 뭐 다른 것도 좀 살까요?"
"됐어. 그녀가 흰 우유를 원하잖아. 원하는 걸 하는 게 맞아."
나는 이사님께 새딸이 생겼으니 새아들이 생겨도 된다며 우철을 디밀었다.
나는 돌다리 자체를 믿지 못하지만,
돌다리를 건너도 될까, 밟힌 돌다리가 아프지 않을까, 그건 실례가 아닐까를 걱정하는 그녀.
흰 우유를 남기고 우리는 떠났다.
이제 정말 서점.
나는 사고 싶었던 책을 사고 안고 또 점프를 해댔다.
그날이 크리스마스였군.
여자친구까지 버젓이 있는 우철은 이브를 그녀와 함께해서 괜찮다고 내 마음을 주무른다.
"크리스마스에 절에 가는 건 좀 이상한가? 아마 이런 날 절이 제일 외로울지 몰라. 봉은사 가자!"
절 입구에는 '사찰 스타일'으로 만든 트리가 서 있었다.
중심이 된 나무의 꼭대기에서 사선으로 뻗어나온 새끼줄들이 한 바퀴 휘휘 돌아 나무가 되었다. 트리가 되었다.
사람들의 소망을 담은 색색의 종이들이 새끼 줄을 장식하는 방울이 되고 스트라이프 지팡이가 되고 선물상자가 되어
이제껏 본 어떤 트리보다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수 있다.
나와 우철은 열심히 뭔가를 적었다.
내가 찢은 수첩의 내지가 너무 커서였을까.
우리는 논술시험 치는 수험생들처럼 머리를 쳐박고 오래도록 무언가를 적었다.
비좁은 새끼줄에 우리의 소망을 억지로 끼워넣고 절을 올렸다.
절 안쪽으로 더 들어가니 공중을 가려버린 연등들. 숨이 막힌 내가 말했다.
"부처님 참 피곤하시겠다. 저 많은 소망들 들어줄라면. 이루어주는 건 됐고 들어주는 것만 해도 피곤하겠어."
"우리 이따 나갈 때 그 종이 태워버려요!"
이유를 말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나는 우철의 마음에 동의하고 감탄해 어퍼컷 한 방을 맞은 것 같았다.
"그래, 차라리 태워서 바람에 날려버리자. 아예 저 트리까지 다 태워버릴까?"
갑자기 인간의 좋은 욕망들까지 탐욕과 과욕으로 느껴져 소름이 돋고 그 속에 내가 끼어 있다는 걸 안 순간
목욕탕에서 막 씻고 나왔을 때 막 씻으러 들어가는 사람을 볼 때의 우월감과
내가 막 씻으러 들어갈 때 막 씻고 나온 사람도 이 기분이었을 것이라는 뒤늦은 깨달음이 동시에 왔다.
우리는 봉은사에서 나와 생맥주를 마시며 오래도록 얘기했다.
우철은 아버지가 만든 가족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내가 만들 가족에 대해 말했다.
거짓말처럼 지하 호프집에는 두 명의 아이가 뛰어다녔고 여자 아이는 내가 거는 말에 슬슬 웃기까지 했다.
"사진 찍어도 돼?" 그녀는 또 슬슬 웃으며 내 카메라에 놀라 도망가지 않고 수줍어했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가진 것 중에서 뭔가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땅치 않은 차에 미니어처 향수가 보였다.
화장품 가방에서 꺼내서 그녀에게 건네며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이거 한번도 안 쓴 거야. 가끔 뿌리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너무 많이 쓰지는 마.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어."
정확치는 않지만 대충 저 따위 얘기를 해 주었다.
그 아이는 나를 잊었겠지만 나는 기억한다.
소망도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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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