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지우는 일이 이렇게나 어려운 일인 줄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시작하지 않았을 텐데...
없애려 할수록 그것은 갯벌 속의 낙지처럼...
더욱 더 깊이 흔적을 남기며 숨어든다.
결국에는 끌어올리겠지만... 그 상처는 더할 수 없이 깊어만져 내 몸을 관통하려 든다.
이제... 그 낙지는 내 속을 빠져나갔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을 만큼의 긴 구덩이를 남기고...
나는 그 속에 나를 채우려 한다.
밑이 빠져버린 독에 물을 붓기 전의 절망감이 먼저 엄습해 오지만,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것들은 내 속에 채우고 싶지가 않다.
티끌만큼도 남겨놓고 싶지가 않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나니 채울 것이라고는 '나 자신' 밖에 남지 않았다.
난 이제 아무 것도 믿지 않으니...
어쩌면 아주 오래 전에 그걸 감지했는지도 모른다.
감지했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 외면했는지도...
결국에는 이렇게 다 들통나 버릴 걸.
이제라도, 뒤늦게라도 뼈저리게 알게 된 걸 감사히 여겨야 하나.
감사라...
사실 고마울 것까지는 없겠다. 이제 내 속에 나밖에 없는데.
그건 바로 외로움을 말하는 거니까.
지독한 외로움, 그게 고마울 리는 없지.
나 아닌 사람들에게 더 이상 배신당하기 싫어 내 속으로 내가 숨어드는 거니까.
그래도 속은 한결 편하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거 같기도 하고, 원래 나 자신으로 돌아가려고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은 것도 같고...
하여튼 생소한 느낌이다.
어떤 것도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고, 집착하고 싶은 것도 없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흘러가는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그저 내 일 같지 않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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