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숫자'를 매개로 기억된다.
# 아버지와 관련된 내 첫 기억은 '나이'다.
그 때 나는 취학 전이었다.
아버지는 이제 막 깨어나 이불을 걷어내는 내게 '잘 잤니?'가 아니라 '너 몇 살이여?'라고 물었다.
모르겠다.
'7살'
'멍청한 것. 지 나이도 모르고. 막내, 넌 몇 살이여?'
'4살'
막내는 늘 정확히 제 나이를 말했다.
크고 동근 눈에 주름까지 집어가며 밝게 웃는 얼굴로.
'멍청한 것이 동생도 아는 나이를 왜 몰러? 너 몇 살이여?'
결국 내가 아는 숫자를 다 뱉어내놓고 아침도 먹기 전에 비난으로 배를 채웠다.
저녁에는 잘 물어보지 않았는데, 어느날 저녁 할아버지가 있는 자리에서 갑자기 나이를 물었다.
다행히 동생에게 먼저 물었다.
재빨리 일어나 방문을 여는데
'너 어디 가?'
'마당에 오줌 누러요.'
'나이 말하고 나가'
'급한데. 갔다 와서 말할께요.'
하얀 엉덩이를 드러내고 없는 오줌을 쥐어짜며 드넓은 마당에서 달을 보며 쥐가 나기 전까지 앉아 있어야 했다.
달이 참 밝았다.
그날 따라 머릿속도 참 환했다.
동생에 대한 열등감인지 나이도 모르는 내 자신에 대한 비애감인지 가족들 앞에서의 쪽팔림 때문인지 나는 달을 보며 울었다.
# 아버지는 '구구단'을 다 외울 때까지 일요일 텔레비전 시청을 금지시켰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나는 구구단을 외우지 못했다.
3, 4단까지는 외우겠는데 그 이상은 도저히 외울 수 없었다.
이해를 해야 외울 수 있는데 그냥 노래처럼 줄줄 외우라는데 노래가사처럼 가슴을 울리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나머지를 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사태의 심각성에 분노했다.
막내는 1학년이면서 숱하게 나머지를 해도 모르는 척하더니만.
급기야 온 가족이 모여 텔레비전 시청을 하는 일요일에, 나만 작은 방으로 보내졌다.
'구구단을 다 외우면 시청을 허용하겠다'는 핵 폭탄 투하 선언보다 무서운 발언과 함께.
하루만에 구구단을 다 외울만큼 나는 천재가 못 된다.
그랬다면 한 자리 숫자인 나이를 외우지 못하진 않았을 테니까.
가족들이 다 같이 까르르 웃어제낄 때마다 심장이 찌릿거렸다.
작은 방이 감옥 같았다.
이불을 개켜 얹어놓는 선반 아래서 산수 공책을 폈다.
구구단 책받침에 써 있는 구구단을 공책에 옮겨 적으며 나는 울었다.
소리내면 쫓아올까 봐 침 삼키듯 울었다.
# 한의사가 돼야 한다며 무조건 '이과'에 집어넣었다.
두 언니 모두 문과에 보내 대학 진학을 시키고, 시킬 예정이었던 아버지는 문과가 취직이 잘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의사가 되려면 이과에 가야한다는 것도 알았다.
불행히도 딱 걸렸다.
'너는 무조건 이과 가야 된다.'
'싫어요. 전 수학 못해요. 문과 갈래요. 언니들처럼.'
'잘나도 아빠, 못나도 아빠'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 말은 아버지가 자식이 자신이 명령한 일을 시행하지 않을 때,
그 자식이 꽤 쟁쟁하게 버틸 때,
말로 안 되겠으니 매로 다스리기 직전에 하는 말이다.
밥상을 펴놓고 신문-아버지는 신문 귀퉁이에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다-에 메모까지 해 가며
내가 왜 이과에 가야 하는지 설명하는 아버지.
하지만 나는 문과에 가야 했다.
수학 빵점 맞을 내 모습을 상상하니 세상에서 제일 작은 생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오싹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너 문과 가면 공부 잘할 수 있겄냐?'
우등반에 속한 두 언니보다 잘해야 잘한 거라고 인정할 것이 뻔한 아버지 앞이어서 그랬을까.
나는 '예'라고 답하지 못했다.
대신 '가 봐야 알죠.'
가 보면 알았을 텐데 가 보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고3 어느 날, 빵점짜리 수학 시험지를 받아들고 담임인 수학 선생에게 불려나가
아침자율학습시간 내내 교탁 옆에서 무릎 꿇고 손 들고 있어야했다.
교실 바닥은 참 차가웠다.
이미 지난 해에 이런 날이 올 것을 예상해서인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유품 중 내가 지금까지 사용하는 건 CASIO 계산기다.
물건 고르는 안목이 있고 고른 물건은 오래 쓰고 상하지 않게 고이 고이 쓰던 아버지의 물건답게
내 기억이 여물기 시작했을 때부터 사용해 온 계산기는 내 나이만큼의 수명을 자랑하고 있다.
그 계산기를 사용하는 건 아버지의 숫자와 셈이 내게 넘어오길 바라는 무의식인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가난한 숫자와 셈을 풍성하게 하기 위한 습관도 있다.
차 번호판을 보며 네 개의 숫자들로 등식을 만들거나 연관을 짓는 놀이인데 이런 식이다.
2137이라는 번호판을 보며 3X7=21이라는 등식을 만든다든가
3469이라는 번호판을 보며 3+1=4 4+2=6 6+3=9처럼 연관된 등식들을 만든다든가
하지만 나는 여전히 셈에 약하다.
하긴 하는데 엉터리 공식에 오답 투성이다.
어떤 문제가 주어지면 내 나름의 공식을 대입해-오답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개의 공식을 대입한다-
여러 개의 보기를 준비하지만 대개 정답은 보기 밖에 있다.
(정답이 없는 문제가 차라리 낫다고 한강 가서 괴물한테만 말하고 싶다.)
그 문제를 특히 열심히 풀어 많은 보기를 준비했는데 오답일 때, 나는, 당황한다.
내 보기의 답들이 10, 7, 60이고 정답이 20이라고 하면 나는 당황한다.
그렇지만 화가 나지는 않는다.
그걸 이해만 시켜준다면.
이해시켜주지 않으면서 그게 정답이라고만 하면 나는 화가 난다.
가르치는 건 싫다.
내가 교사를 포기한 이유 중 큰 할이다.
깨달음을 얻도록 도움을 주는 건 좋다.
고기 잡는 법이고 그건 가치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가 내게 그렇게 해 주길 원했다.
태어나 처음 맞는 상황들에서 아이는 얼마나 당황했을까.
'나이가 왜? 구구단은 뭐더러? 이과에 굳이?' 하는 아이에게
'나이는 들수록 아름다운 것이니 들어감을 알아두어야 하고,
구구단은 관계의 넓이를 알아가는 데 필요하며 그래야 나누어줄 수도 있는 것이니 알아두어야 하고,
이과에 가면 한의사가 될 기회를 얻게 되고 내 딸이 한의사가 되어주기를 진정으로 원하는데 들어주겠니?'
라고 말해주었다면.
하지만 아버지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이해를 구하지도, 깨달음을 얻도록 조언하지도 않았다.
그저 '떨어뜨리면 받아먹으라'는 식이었다.
왜?
말해줘봐야 이해를 못할까 봐?
이해할 때까지 기다리기가 지루해서?
이해만 하고 받아들이지 않을까 봐?
나이와 구구단조차 못 외우는 멍청한 딸에게는 명령이 적합해서?
분수 같은 나의 ?에 답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그는 언제까지나 아무런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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