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새엄마를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다.
뻑 하면 누구의 집에서 자고 오는지 궁금도 하셨을 거다.
흔하디 흔한 딸래미 중 하나지만.
그래서 어느 날 아침, 새엄마가 아침산책을 제안하자 엄마한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엄마네가 있는 서초동에서 가까운 곳에 엄마가 일하는 우리은행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 날 아침 새삼 떠올랐다.
엄마의 설명대로 찾아갔지만 매번 다른 자리.
결국 네번째 통화쯤 있는대로 '승질'을 피우고, 결국 찾아내긴 했다.
엄마는 매번 '억수로 큰 건물에 억수로 큰 은행'이라고 했건만.
어떻게 아셨는지, 아니면 계속 기다리고 계셨는지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문을 열고 나오시는 울 엄마.
새엄마를 보시더니 함박 웃으신다.
울 엄마의 아픈 은색 이들이 마음을 찔러댔다.
막내가 틀니 해 드리기 전에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엄마의 이로 갈비 좀 맘 편하게 뜯을 수 있게 해 드려야 할 텐데.
도대체 무지랭이 같은 나란 인간은 어디에 쓸모가 있는 건지.
은행을 가로질러 가니 지붕이 낮은 부엌 방과 탈의실 방이 있었다.
엄마는 일을 끝내놓고 그 탈의실 방의 낮은 의자에 앉으셔서 무료신문과 주요 일간지들을 읽으신다고 한다.
'엄마한테 간 게 이번이 처음이냐'고 묻는 새엄마.
맞다, 처음이다.
혼자서 가기는 두려웠다.
돌아서 나올 때 울고 말 것 같아서.
누구라도 같이 가 줬으면 했다.
새엄마가 그렇게 해 주었다.
작년 12월에 보라색 패딩 점퍼를 사서는 엄마 앞에서 모델처럼 앞태 뒷태를 자랑했다.
엄마는 '우리 딸래미는 뭘 입혀놔도 태가 난다'고 하셨다.
근데 문득 엄마 걸 하나도 사지 않은 게 생각나 미안해졌다.
"엄마, 엄마는 새벽부터 은행에서 일해 가 50만원도 빠듯하게 버는데 내는 맘에 든다꼬 10만원도 넘는 잠바 사 입어가 미안타."
"아고 뭐라카노, 야가. 내가 몬 사주는 기 더 미안치."
엄마가 그런 마음이신 줄 몰랐다.
내가 옷 자랑을 할 때마다 아파하시는 줄은 알았지만 그 이유가 그러할 줄 몰랐다.
엄마는 '새엄마는 앞으로 무조건 잘 될 거'라고 하셨다.
'얼굴도 예쁘고 웃는 모습도 좋아서 남자들이 가만 안 내버려둘 것 같다'고 하셨다.
키도 나만 하고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라 "계속 GO!"라는 엄마만의 기분 좋은 찬사를 보내셨다.
그렇게 신나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지셨다.
"근데, 세영아. 니 새엄마 엄마한테 데꼬 오는 거 안 챙피하더나?"
"뭐가? 왜?"
"아니, 그 분은 좋은 거 많이 보고 댕기고 좋은 거 많이 하고 댕겼을 낀데, 내한테 데꼬 오기가."
엄마가 무슨 뜻을 전하고자 하셨는지 너무나 잘 알았지만, 나는 친절하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뭐라카노? 고마 자자. 별."
'별 이상한 말씀을 다 하신다'는 듯 쳐다뵙고 안방 불을 끄고 나란히 누웠다.
그리고 엊그제 "채무자를 면책한다"는 법원 결정문을 받았다.
엄마는 이제 날아도 되신다.
자신의 아픔에 네 딸의 아픔까지 더해 살아온 시간이었다.
나는 엄마의 면책이 단지 법률사무소의 덕이라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엄마는 청소를 하셨다.
건물 청소도 하셨고, 남이 사는 아파트 청소도 하셨다.
청소하는 곳에서 나온 폐지와 신문을 차곡차곡 모아 주말마다 고물상에 갖다주고 몇 백원을 받으셨다.
끓여서 먹으면 그만인데도 멀리 있는 약수터까지 가서 샘물을 길어오셨다.
때마다 절에 가 절을 하셨다.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메이 밥을 주시고 똥과 오줌을 치우시고 아침을 드셨다.
목욕탕에 가서 남의 등을 밀어주고 남에게 등을 내주며 때를 미셨다.
자기보다 더 못한 상황에 있는 사람을 보면 돕지는 못해도 꼭 집에 돌아와 내게 들려 주셨다.
내 주변에 혼자 사는 인물들에게 김치나 밑반찬을 나누어주고 "감사히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는 말을 전해 들으시면
가장 기쁜 표정으로 '다시 또 해 주마'고 굳은 약속을 하곤 하셨다.
이런 울 엄마에게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난 걸까.
우주의 어떤 에너지가 그녀를 철사줄로 묶었던 걸까.
이제 '벗어났으니 그만!'이라 하기에 그 시간이 그녀에게 너무 길었다는 혐의를 거둘 수가 없다.
몇 천 명의 키도령 유령이 온다 해도 그녀의 속을 다 풀어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음껏 웃지 못하셨다.
믿기지 않는다는 말만 하셨다.
"채무자를 면책한다"는 그 짧은 문장이 의심스러우신가 보았다.
그런 일이 없었으니.
언제나 그녀를 채무자 취급했던 57년이 그 한 순간, 그 한 문장으로 반전될 수 없을 테니.
이제 나는 그녀가 의심 없이 마음 놓고 웃으실 수 있게 되기를 나를 다해 힘써야 한다.
이건 그녀를 채무자 취급한 사람들을 대신해서다.
내가 숱하고 악덕한 채권자들의 뒤에 숨어 있던 한 사람이었음을 사죄하는 길이다.
미제로 남은 일들은 그냥 미제로 남겨둬도 될 테니.
그녀에게만은 예외로.
확신은 없지만.
'그녀를 위해 살아야 할 시간이 왔음'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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