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면 아버지가 떠오른다.
# 아버지는 어머니를 '벽'을 향해 밀었다.
작은 언니와 나는 주산학원에 다녔다.
주산은 9급이었지만 암산은 6급이었던 나는 암산이 너무 재미있었다.
학원에 가는 건 말뚝박기만큼 행복한 일이었다.
학원에 가면 신덕부락에 사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 더 좋았다.
내가 사는 득천부락의 같은 반 친구는 김병주뿐이었고 그는 남자였다.
그리고 나의 친할아버지와 동명이어서 그의 이름을 부른 기억은 거의 없다
신덕부락에는 고순자, 최은정, 윤정애, 이윤화, 최정숙, 김원영, ()정자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방과 후 항상 함께 하교했고 나는 밭둑길을 걸어 노래를 지어부르며 혼자 하교했다.
그 날, 방과 후 혼자 노래를 지어부르고 집에 돌아와 행복한 학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방에서 뭔가 쿵쿵거리는 소리가 났다.
찰싹찰싹하는 소리도 났다.
작은 언니는 울었다.
공포와 분노도 함께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린지 전혀 감지하고 못하고 있었다.
작은 언니는 막내에게 영란이아줌마네 가게에 가서 외갓집에 전화를 하라고 했다.
동생은 주저했다.
나가다가 걸리면 어떻게 될지 두려웠을 거다.
작은 언니가 막내에게 외갓집에 전화를 걸어 '아빠가 엄마를 심하게 때리고 있다고 말해라'고 했을 때
나는 아빠가 엄마를 심하게 때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근데 공사현장에서 나는 것 같은 그 소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건을 던지는 소리라면 매번 달라야 하는데 매번 비슷했다.
그게 엄마의 머리가 방벽에 부딪혀서 난 소리였다는 걸 안 건 불과 몇 년 전이다.
출근을 안해도 되는 날이었는데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다가 이불에 미끄러져 방벽에 머리가 살짝 닿았다.
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였다.
그건 깨달음이 아니라 슬픈 빙하 같았다.
당장에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러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이길 바랐다.
엄마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는 그게 진실임을 최근에 알려주었다.
'엄마는 왜 그렇게 아픈 데가 많아? 체질이 약한 건 아닌 것 같은데.
할머니도 그렇게 여기저기 많이 아팠나? 의사가 뭐래?'
'하도 맞아서 그렇지 뭐. 고막도 터졌었는데.'
아, 엄마는 고막도 터졌었구나.
무심한 말투로 대화를 나누며 나는 엄마보다 뒤로 물러앉았다.
그리고 엄마한테 들키지 않을 만큼만 울었다.
# '뺨'을 부비다 문득 아버지의 손이 생각난다.
어머니가, 아버지가 마당에 세워둔 봉고를 몰아 앞집 벽을 무너뜨렸다.
어머니가 막내더러 차에 타라고 했고 시동을 걸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이전에 한번도 운전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최근에 밝힌 어머니의 변으로는 '그냥 운전석에 앉아보고 싶어서 올라탔다가 뭔가를 잘못 작동시킨 것 같다'였다.
아버지는 앞집 할머니에게 공사비를 주고 말 많은 할머니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그 날 오후, 작은 방에서는 찰싹찰싹 거리는 소리가 초침처럼 정확한 간격으로 들렸다.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깨달은 건 계속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안방으로 가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내가 문을 언제 열지 몰랐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뺨을 때리고 있었다.
아, 그 소리가 그 소리였구나.
어떻게 그렇게 주기적으로 때릴 수 있지.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번에는 막내가 외갓집에 전화를 걸러 나가지 않았으므로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 이모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도 뺨을 맞아본 적이 있는데 내가 들었던 소리와 그 때 안방에서 들려온 소리는 매우 달랐다.
아마 큰 언니의 여린 손과 아버지의 단단한 손의 차이였나보다.
작은 방에 모여 있던 자매들은 이불을 덮어쓰고 귀를 막고 그 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울었다.
# 아버지는 큰 언니의 머리에 '망치'를 내렸다.
큰 언니는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그 기억을 지우지 못하는 뇌를 이고 살아간다.
나는 그 기억만큼은 가짜거나 상한 기억이길 바란다.
어머니가 외갓집에 오래 오래 가 있는 동안 큰 언니가 온 가족의 빨래를 해야 했다.
언니는 중학생이었다.
세탁기가 없을 당시여서 차가운 물에 손을 담구었다가 시려우면 호호 불어 데우고
다시 손을 담구어가며 빨래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찌어찌하여-들었는데 까먹었다. 내가 맞은 게 아니어서 그런가.
그래도 괜찮다. 망치로 맞을 이유란 건 애당초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언니를 불렀고 불려간 언니의 머리에 자신의 옆에 있던 망치를 내렸다.
나는 그 비슷한 상황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모범생이 아니었던 막내가 깨워도 일어나지 않자 아버지가 자신의 책상 밑에 있던 야구방망이를 꺼내
막내의 엉덩이를 때리는 장면은 본 적이 있다.
큰 언니가 한창 반항을 하느라 학교 갈 때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자
'너 이 년, 오늘 학교 가지 말어'라고 외치고 언니의 엉덩이를 야구방망이로 때리던 장면을 본 적도 있다.
큰 언니부터 작은 언니, 그리고 나까지 셋은 그 이전까지 결석한 적이 없었다.
큰 언니가 테이프를 끊었다.
그리고 우리집이 아닌 어느 집에서도 '아버지가 나, 또는 우리 언니, 오빠, 누나, 형, 동생의 머리에
망치를 내렸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고 목도한 적도 없다.
책에서도 본 적이 없다.
자식이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였다거나 어머니가 자식을 냉장고에 넣었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하여튼 그 때 언니의 머리에는 혹이 아주 크게 났단다.
피도 났다고 한 것도 같고 안한 것도 같다.
여튼 죽지는 않았다.
뇌에 손상을 입지도 않았다.
교묘하다는 데 분노해야 하는 건지 죽지 않았다는 데에 다행을 느껴야 하는 건지.
언니는 짐을 싸 외갓집으로 갔고 외할머니와 어머니와 이모와 함께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언니를 집으로 돌려보내며 어른들은
'우리도 너를 보내고 싶지 않지만, 니가 안 가면 동생들이 힘들다'고 했단다.
최근에 언니에게 그 얘기를 들으며 나는 '미안하다'고 했다.
언니의 동생으로 태어나서 미안하다고.
지옥보다 가기 싫었을 집으로 돌아오게 한 사람 중에 내가 있어서 미안하다고.
내 존재가 누군가의 불행이었다니.
그 까마득한 슬픔에 20여년 전의 내 존재를 부정하며 맥주와 함께 눈물을 마셨다.
언니는 원망하지 않았다.
기억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너무나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언니는 그 선명한 기억을 안고 있는 뇌를 이고 살아가고 있다.
이 외에도 아버지가 행한 폭력과 구타의 기억은 상당하다.
더 하면 험담 같아질까 봐 여기까지만 한다.
위의 세 기억은 가장 치명적이고 깊은 기억들이다.
나에게 행해진 건 주유소에서 일하고 받은 돈을 아버지에게 달라고 했는데
내가 거부하며 대들어 멱살을 잡힌 일이 가장 인상적이다.
심한 구타는 아니었지만 안방문 밖에 서 있다가 멱살이 잡힌 채로 안방으로 끌려갔다.
스물의 나는 치매에 걸린 것도 아니면서 방에 오줌을 눴다.
지금이라면 경찰에 신고해 격리라도 했겠지만
그 당시 우리가 살던 그 동네에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뒷집 순X이 엄마는 이틀에 한 번 꼴로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서는 개밥을 주러 마당으로 내려왔고
때때로 '이래가는 더는 못 살겠다'고, 집을 나가련다고 소리쳐 동네 사람들이 와 말려주기도 했다.
X주 엄마도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 가게에 나와
내가 낸 새우깡 값으로 낸 500원을 받아넣고 잔돈을 치러주곤 했다.
안대로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밤탱이 눈을 가려줄 만큼 큰 안대를 구하지는 못한 듯했다.
농촌에서는 힘과 노동이 필요한데, 특히 남자의 것이 필요하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비닐하우스를 세우고 벼를 베고 탈곡을 하는 등등의 일에는
여자보다 남자의 힘이 적합하다.
그러니 일 많이 하는 남자들은 생색을 내고 싶어했고 버럭버럭 힘을 과시하고 싶어했다.
'더러워도 우짜노. 비엔나 소시지처럼 줄줄이 싸질러논 새끼들은 우얄끼고.
고마 한 대 맞고 치아삐리지. 지가 낼로 죽이기야 하겠나. 그라고 이 재산이 다 지 끼가.
힘 쪼께 쎄다꼬 힘 자랑하고 싶어가 저 지랄인데 마 받아주야 안 되겠나.'
그녀들은 그렇게 인내하고 자위하며 살았다.
밭 좀 갈고 벼 좀 심군다고 더럽게 잘난 척하는 못난 남정네들의 발정과 배설을 다 받아주며 살았다.
우리집은 그런 덕천부락에 있었지만 농사를 짓지는 않았다.
논은 소작을 주어 가을마다 쌀로 받았다.
300여평의 밭은 어머니의 땅이었다.
밭 좀 갈고 벼 좀 심구지도 않은 우리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
유행인 줄 알고 따라한 건가.
내가 보지 못한 그의 역사 속에 그 답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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